1. 역사학 - 석굴암1
1). 석굴암1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중턱에 위치한 암자다. 신라의 호국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통일신라 시기 김대성의 주도로 축조되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24호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토함산 아랫자락의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는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이나, 관람 시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관람하는 것만 가능하다.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 공기 조화 장치가 돌아가고 있다. 예외적으로 부처님 오신 날에는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된다. 석굴암은 불교의 전래 경로였던 인도와 중국[4]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반도는 조각 난도가 높은 돌인 화강암과 청석류가 많고 기후도 달라 저들 나라만큼 석굴이 많이, 크게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시기 신라에서는 군위군의 삼존석, 골굴사의 12개 석굴, 양산시의 미타암, 남산 칠불암 등 한국사에서 손꼽게 석굴사원이 많이 지어졌다. 그중에서도 석굴암은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곳이다. 고려 건국 이후 귀족 세계에서 멀어진 석굴암은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가끔 언급된다. 17세기~18세기 정시함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만 명 승첩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어느 정도 석굴암이 관리되었고, 산중일기를 보면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을 보러 오는 사람이 언급되므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 영조 34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 병사 조예 상이 크게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경주도 평범한 지방 도시로 위상이 떨어지고 불교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불국사마저 폐사되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미터 산 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히고 방치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해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 비어 있는 절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8월 세키 노 타다신,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의 일제 유수의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뒤로 얼마나 한국 유적지 이곳저곳을 활발하게 조사했는지 보면, 불국사를 가놓고도 석굴암엔 안 갔음은 석굴암의 존재를 몰랐다는 증거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기록들이 석굴암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1891년 풍양 조씨 가문에 의해서 석굴암이 중수되었다는 '토함산 석굴 중수 상동 문' 등, 석굴암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891년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방치되었고, 토함산의 돌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을 가던 우체부가 범록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해 보고하면서 1907년 재발견되었다. 당시 초기 조사에서 석굴 내부는 이미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이 화강암 벽을 손상함을 몰랐던 것도 문제였다. 21세기에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기 때문에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다면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뒤 2, 3년 동안은 내부에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대에는 대부분은 이걸 몰랐다. 또한 공사를 주도한 것이 석공 전문가가 아니라 철도를 놓던 터널 공사 전문가였던 것도 문제였다. 당연히 석굴암에 의도된 설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이들이 방습을 위해 도입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또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이것은 석굴 내부의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지형이었다. 수분은 0.1도 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 물 분자 이동이 저하되어 결로 현상이 일어나므로, 샘물로 석굴암 바닥을 냉각해 일부러 바닥에 결로를 일으켜 습기를 배출하게 한 것이다. 일제의 건축공들은 이 샘물을 습기의 원인으로 오인해서 아연 관을 설치해 배수해 버렸다. 그러자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굴 벽면 표면에 결로가 생기기 위해 시작했다. 덕분에 공사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했다.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부식시키기 위해 시작한 것은 덤이다. 그래서 1910년 조선 통감부는 처음엔 산간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한 뒤 경성부로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해체를 시작해 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전을 포기하고, 1913~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전면적으로 수리를 했다.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보수하기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유적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다른 지역의 역사적인 유적을 발굴하고 이를 복원하는 것이 국가 위신을 홍보하는 사업으로 크게 유행했으며, 이러한 시류를 따라 일본 역시 자국의 식민지로 새로이 편입한 한반도의 여러 가지 문화재를 지정하고 조사하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발간한 문화재 관련 보고서와 연차 사업으로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서도 병합한 뒤 곧바로 대대적으로 문화재를 조사했던 정황이 드러난다. 1913년 10월부터 감개들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히 해체한 뒤,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거액을 들여 준비한 복원 사업은 예상외로 잘 풀리지 않았다.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타설했는데 이는 아름다운 화강암과 당대 최신 건축 기법을 이용한 첨단 수리 방법이었다. 문제는 콘크리트가 방수에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하다는 것이었는데, 당대에는 콘크리트의 물성에 대해 지금처럼 정밀하게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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