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학 - 동학 최제우
1). 동학 최제우
최제우는 조선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어 사대해 왔던 중국이 서방의 영국에게 패한 것에 국제정세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말기 조선의 여러 사회적 모순을 기존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만으로 헤쳐 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바야흐로 격동기 조선에서, 구시대의 사대주의적 외래 학문인 유교도 아니고, 한때 융성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와서는 숭유억불 정책 속에 쇠퇴한 불교도 아니며, 서방 선교사를 통해 들어와 침략전쟁을 대표했던 그리스도교도 아닌, 새 시대를 위한 개혁과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 한민족 고유의 신앙을 통한 정신적 결집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절실함 속에서 지극히 사람 중심의 학문이 만들어졌으며, 이를 서학과 반대되는 학문이라 하여 '동학'이라 명명했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는 경주 최씨로, 어릴 때 이름은 복술·제철이었으며 후일 어리석은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자기 의지의 표현으로 제우라고 개명하였다.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고 조선에서 창건한 사상. 그리고 현재 천도교를 비롯한 여러 민족 종교의 모태이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집안으로 아버지 최촉은 벼슬을 하지 못해 가세가 기운 데다가 그의 어머니 국산 한 씨와 아버지와의 결혼이 재가였기에 재가 여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그가 10살 때 사망한다. 13세 때 울산 출신 박씨와 결혼했으나 17세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셔 결국 처가인 울산으로 옮겨간다. 울산으로 옮겨간 후 1855년 을묘년 어느 날 한 승려가 찾아와 자신은 금강산에서 왔는데 백 일 동안 치성을 드리던 중 이상한 책 한 권을 얻게 되었는데 해석할 사람을 찾아다니던 중이라며 그 책을 최제우에게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것을 을묘 천석 사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비체험으로 최제우는 1859년 다시 구미 용담으로 돌아와 입구에 ‘도기 장존 사불인 세간 중인 부동 귀’라 써서 붙이고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에 매진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비서를 기독교의 성경 혹은 하고 주장하나, 주류 학계와 천도교 측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사상적인 부분에서도 기독교와 동학은 차이가 분명하며, 당시 이미 널리 알려진 기독교계 서적을 굳이 비서로 왜곡할 이유가 없고 최제우는 울산으로 옮겨가기 전 3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갖가지 세상 경험을 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남한 계열에서는 그가 수도 생활을 할 때, 조선 후기의 도사인 연단 이운규의 제자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최제우, 김일부터, 김광화와 동문 출신, 혹은 동문수학한 사이라는 것이며 시천주 주문 또한 이운규에게서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셋의 연령 차이가 있고, 행적 역시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 설은 부정되고 있다. 셋 모두 후천개벽을 자신들의 중심 사상으로 놓았던 점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서학에 대항하는 동쪽의 학문이라는 동학을 창시하였고,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 지라는 주문을 외치고, 유교와 불교의 쇠운 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동학이 서서히 퍼져나가자 현혹한다고 하여 최제우와 그의 추종자들을 압송하여 1864년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시켰다. 최제우의 순교 이후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지하에 숨어다니면서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특히 동경대전 등 경전을 간행하면서 동학의 교단을 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시형의 시기에 포접제라는 제도도 새롭게 구축되었다. 그래서 동학은 최제우의 순교 이후에도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교조 신원을 내세우면서 서서히 농촌 사회에도 파고드는 모습들을 보여줬다. 특히 1871년 일어났던 이필제의 난은 동학의 성격이 서서히 사회 개혁적인 모습도 띠게 된다는 점을 암시하며 다음에 일어나게 되는 동학농민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필제의 난은 진압당했으나 동학은 역시 더 세력이 커지면서 1880년대에 이르면 삼남 일대를 장악하게 되고,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조신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1892년 삼계에서 첫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1893년에는 광화문에서 복합 상소를 하였다. 그리고 펼쳐진 보은 집회에서 척 왜야 창의를 내세우며 반봉건ㆍ반외세의 성격이 드러나기 위해 시작했다. 한편 이때부터 동학에서는 북접과 남접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접은 최시형을 위시한 동학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는 온건파 세력들이 이끌었으며, 남접은 전봉준 등 동학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 급진파 세력들이 이끌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인해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같은 학교인 듯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외치며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성공을 거두며 전주성에 입성,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하자 반일을 기치로 내세운 2차 봉기가 발생했으며, 이때는 그동안 관망 자세로 있었던 북접의 지도자들도 참가하게 된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고, 이후 남접의 지도자들은 대거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살아남은 북접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숨어다니면서 동학을 포교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는 영할당이니 남 학당이니 활빈당이니 하는 무장 조직에 많이 투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8년 최시형이 처형당하고, 1901년 살아남은 핵심 지도부가 죄다 관군에 체포당하자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의 도움으로 국내의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여, 손병희는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하여 진보화를 만들게 하였고, 비록 진보하는 여전히 탄압당했지만,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을 도왔던 점이 인정되어 일진회의 압박을 받고 대한제국 정부는 결국 동학에 대한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진보하는 일진회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일진회가 을사늑약에 대해 찬성했던 점이 계기가 되어서 교주 손병희와 이용구 사이가 벌어지게 되면서 손병희는 1905년 12월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고, 이용구와 일진회를 천도교에서 제명한다. 이후 이용구와 일진회는 시천교를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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