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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보덕국

by go1700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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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보덕국

1). 보덕국

 

신라의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 안성을 보덕 국왕으로 책봉하고 안성을 따르는 고구려 유민들을 안치시키며 탄생한 나라다. 려는 한반도 남부의 익산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했던 국가이다. 신라의 번 속국이었지만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갖추고 나당 전쟁에 참전하거나 일본과 견 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는 등 나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0년간 나라가 지속되다가 안 승이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고 안성의 친족 대문과 실족 등이 일으킨 반란이 신라에 의해 진압되면서 멸망했다. 멸망 후 고구려 귀족과 유민들은 신라의 95소경 중 하나인 남원경으로 이전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현악기인 거문고가 전래하였다. 668,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멸망한 뒤, 완승은 사야 도하하게 머무르고 있었다. 670년 검모잠이 소야도에 있던 안성을 한성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 부흥군을 일으켰다. 그 후 고구려 부흥군은 소형 다식을 보내 신라에 대해 복속할 것을 약속하고 도움을 청했다. 문무왕은 그들을 걔 저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당군의 압박을 받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안 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했다. 674년 신라의 문무왕은 인승에게 걔 저를 하사하고 보덕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는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편 화합 정책의 하나였다. 674년 보덕국은 고려 국호를 내세워 위도 대형 한자와 전부 대형 석간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김 이익이 이때 쓰쿠시까지 안내해 주었다고 나와 있다. 679년 신라군의 휘하에서 나당전쟁에 참전하여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680년 신라 문무왕은 보덕국에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 비단 100단을 주고 문무왕의 조카딸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이에 화답하여 보덕국의 대장군 태대형 고연무가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신라 왕족과 보덕국의 혼례를 맞게 해준 것을 사례하는 교서를 전하였다. 6836월에는 보덕국에서 하부 보유 괘로 모 절과 대고 안 가는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신라가 대나마 김석기를 보내 보덕국의 사신을 치고 시까지 호송하였다. 683년 안승은 신문왕으로부터 소 판의 관직을 받고 김씨 성을 사성 받은 뒷집, 토지를 하사받아 보덕국과 격리된 채 신라 중앙 귀족이 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안성의 친족이자 보덕국의 장수인 대문이 반란을 기도하다가 처형되자 실족이 우두머리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토벌군인 신라 장군 피부일·김영윤 등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줬다. 결국 신라에 의해 진압되어 보덕국은 683년 멸망하였다. 685년 신라의 신문왕은 전국의 행정 구역을 9·5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보덕국은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 왕족과 귀족,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되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백제 유민들의 근거지였다. 그래서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포로로 데려가자, 반대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영토로 이주시키면서 보덕국을 세우고 마한과 연합하게 하였다. 보덕 왕 안승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이자. 횡성 고 씨 중시조 고인 승의 동복동생이다.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 후기에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던 세력이므로 안 승이 연정 토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실제로는 고구려 왕족과 대등하였다. 보덕국이 멸망하고 고구려인들은 5소경 중 호남지역을 관할하는 남원경으로 이주하여 보구려 귀족은 6두품의 신분으로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고 고구려 유민은 신라의 중앙군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으로 편입되었다. 보덕국 멸망 후 고구려 귀족과 유민들은 5소경 중 호남지역을 관할하는 남원경으로 이주하여 귀족은 6두품의 신분으로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고 유민은 신라의 중앙군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현악기 거문고가 남원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에 전파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 옥 공영의 아들 옥 보고가 남원경에 위치한 지리산 윤상원에게 들어가 50년 동안 상원고가, 중원고가, 화원고가 등 새로운 거문고 가락 30곡을 지어 널리 전파하였다. 보덕국은 형식적으로 신라의 힘을 빌려 세워진 번 속국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를 계승하여 보려 국호를 사용하고 외교에서도 일본이 보덕국을 고구려의 후신으로 견주하고 견 고려사를 보내는 등 높은 자치성을 보였다. 보덕국의 관직 체계는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계승하였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보덕국 사신의 관직명 상부와 하부, 위도 대형, 전부 대형, 보유, 태대형 등 고구려에서 쓰이던 직책들이다. 보덕국의 치솟는 전북 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50-3에 위치한 익산 토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영윤 조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때에 고구려의 남은 적인 실족이 보덕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그를 토벌할 것을 명하고 김영윤을 황금서당 보기 감으로 삼았다."라는 사료가 남아있다. 남원경의 취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고령군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685년에 남원소경을 설치하였다. 757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면서 남원소경을 남원경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때에도 남원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여 지금에 이른다. 남원경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5년에 설치된 소경이다. 문무왕과 신문왕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통치 체제를 정비하면서 차례로 소경을 설치하였는데 남원경은 685년에 서원경과 함께 백제 지역에 설치되었다. 소경의 설치 이유는 수도가 동남쪽으로 치우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남원경은 신라 왕경에서 호남평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었다. 691년에는 성을 쌓아서 방어 체계를 갖추기도 했다. 또한 남원경에는 보덕국을 폐지한 후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남원의 고구려 유민들을 통해 신라에 거문고가 전수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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