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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원효대사

by go1700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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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원효대사


1). 원효대사

 

 '모든 건 자기 마음에 달렸다.'는 해골 물 일화로 유명하며 파계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ㆍ철학사ㆍ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이다. 3학년에 능통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를 두고 만인 지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난세인 삼국 통일전쟁 시기에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고 통일신라의 탄생을 목격했다. 또한 화쟁 사상을 주창해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원래 중국 삼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백제 삼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근거는 6세기 말에 편찬된 백제의 (대승사론현의기)로 백제 승려 혜균의 생각과 많이 닿았다는 평가가 있다. 삼국통일에는 사상적인 통합이 선행되었고, 원효가 그 토대를 쌓았음을 보여준다.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 회고 상이 분황사에 전해졌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 중 한 명이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 여종 전쟁 때 몽골군이 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 생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문서 최상단에 있는 초상화가 남아 있다. 일본 교토의 고잔지에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그림들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였던 묘에 가 불교계의 선각자인 원효를 존경해 신라 시대의 원본 초상화를 보고 이모 한 것이다. 지금은 신라의 원본이 멸실되었으므로, 묘에의 이모작이 당대의 원효 진영에 가장 근접한 초상화라고 여겨진다. 실제로 화풍에서 일본풍이 아닌 한국의 초상화 양식을 따르므로 원본을 충실하게 따라 그렸다고 추정된다. 옥좌에 신발을 벗어놓은 것이 옛날 형식이고, 더부룩한 수염과 검은 피부의 담대한 인상이 문헌 기록에 남은 원효의 파격적인 행적과 걸맞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고려와 조선 대부분의 국왕 어진이 현대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극히 일부임을 감안하면, 한•중•일 불교계에 걸친 원효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압량주에서 내자였던 담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 피곤으로 적대 연 옆에 잉 피곤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뼈대 있는 집안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진골 출신임이 확실한 의상과는 달리 원효는 출신이 확실하지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중국에서 성이 설 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 씨는 신라의 김 씨에서 나왔다.'라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왕실의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소수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해설 씨 종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 있는 추정일 듯하다. 출가 시기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원효에 대해서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취급되는 (송고승전) 것에서 관 채 제 년에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29세에 황룡사로 출가했다거나 출가 이전에 화랑이었다는 말도 꽤 알려졌지만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석가모니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1톨이 사발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저녁으로 한 끼에 밤 2톨밖에 안 준다."라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그 고발을 당하고 와서 막상 보니 밤 1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 끼에 밤 1톨만 주라."라고 판결을 했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 사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가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출가하고 이렇다 할 스승이나 종파 아래에서 일정하게 배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배움을 받으며 본인의 학문을 이어 나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반고 사라는 절에 머물며 낭비 선사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5권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 사는 굴과 영취산의 서북쪽에 있는데, 원효대사라는 이곳에 머무르며 낭비 선사의 가르침을 청하고 (초장 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의 유학을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로 가는 것을 그만둔 후 돌아왔다고 한다. 귀국한 뒤에는 분황사에 주로 머물렀으며, 이후 상당히 특이한 방법[이로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이 유명하다. 다만 원효의 아내가 요석궁의 과부 공주라는 이야기는 일연이 웬만한 원효의 업적은 과에 기록되었으니까 한 두 가지 기이한 일을 쓴 것이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송고승전)이나, (삼국사기) 등에서는 설총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요석공주와의 이야기는 단순히 설화일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계율을 어긴 이후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소성 거사라 칭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문제는 낭비 선사가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 14년, 영취산에 법장을 열었다는 내용에서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약 20살쯤부터 영 취사를 지어서 머물렀다 해도 617년 태생인 원효대사가 10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120살 가까이가 되니 연대상으로 봐도 무리가 있다. 참고로 원효가 머물렀다는 반고 사로 추정되는 절터 근처에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가 존재한다. 애초에 이 두 문화재를 발견한 계기가 반고가 터를 찾고자 폐사지를 답사했기 때문이었다. 말이나 행동을 험하게 하거나 술집과 기생집을 드나들기도 했고,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녔으며, 소를 짓고 강론했으며, 사당이나 여염집에서 잠을 자고, 산과 강을 따라 좌선하는 등 일정한 법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들을 보였다. 물론 원효의 파계와 자유분방한 행보는 속세에 돌아와 낮은 민중들과 함께하는 대중 교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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