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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석굴암2

by go1700 202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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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석굴암2


1). 석굴암2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아스팔트를 바르고 석실 지하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보수 공사를 실시했으나 그런데도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만 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이끼가 또 생겨 1934년에도 증기 세척을 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거친 처리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많이 마모됐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 실무진들은 대형 고대 석조 문화재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특히 이들은 당시 현지의 석공 장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이들을 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게다가 현장의 조선인은 잡역 인부를 빼고는 모두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에서도 방치된 석굴암의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복원 이전에 남긴 사진이나 자료들은 대체로 일본인이 남긴 것인데, 복원 공사를 하며 어떻게 해체했는지 기록하지 않았기에 사진조차도 제대로 남은 게 없다. 만약 해체 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제대로 조립되었든지, 아니면 적어도 어느 지점에 있든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그런 조처를 하지 않은 채 제대로 조사기록을 남기지도 않고 주먹구구로 해체 공사를 추진했다. 그 뒤에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부 때 재보수를 하여 그 위에 돔형으로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 했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온 석조문화재 전문가까지 초빙해서 추진한 공사였으나 그 문화재 전문가는 결정이 난 뒤에야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뒤늦게 "이건 안 되겠다. 하면 안 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복구 공사 전면 취소 및 재설계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조언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 그 결과는 더 미칠듯한 내부 습기로 금세 나타났다. 이중 콘크리트 돔 사이에 들어있는 더운 공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해서 여름이 되면 굴 내부의 상대온도와 상대습도가 급격히 낮아져 석굴 벽면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수준이 되었다. 게다가 이 습기로 인해 내부에 이끼가 더 끼자 이를 제거한답시고 고압 증기를 이용한 세척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이 더 생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서울대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가 투입되어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계속 가동함으로써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썼다. 이로써 일단 에어컨이 돌아가는 동안은 문제없는 상태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에어컨의 미세한 소음과 진동이 수십, 수백 년 계속되면 미세하게 훼손이 된다는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밀폐와 에어컨 처리로 인해 석굴암은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완전 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본래 설계도만 봐도 참배객이 직접 석굴 안으로 들어와서 석굴암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사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린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입구를 틀어막아 버리고 밀폐하는 건 원래 의미를 거의 잃어버리는 뼈 아픈 결정. 게다가 24시간 365일 내내 돌아가는 에어컨 작동이 잠깐이라도 중지된다면 지금도 바로 다시 습기 문제가 발생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미봉책이었다. 하지만 일단 당장 생기는 습기는 제거해야 했기에 김효경 교수팀은 완전 통제 및 에어컨 설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큼은 신자들을 위해 원래 용도대로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방식의 참배가 허용되는데, 이것도 문 열어놓고 에어컨 트는 격이라 자주 그러기는 어렵다. 석굴암의 배치는 법화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석가모니가 가장 많이 설법한 인도 영취산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석가모니 본존불이 가운데 있고 주변을 십대제자와 과거불들, 팔부신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 석굴암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한국 불교 미술사의 석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오히려 점차 쇠퇴한다고 평가받는다. 통일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전제왕권이 수립되고 효성왕~경덕왕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신라의 전제 왕권이 극성기를 맞던 때였으며 화엄종과 같은 종파 불교가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주는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당, 서역, 발해, 일본,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직접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특징은 당나라 성당 시대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실주의를 토대로 신라화 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기 위해 시작한다. 즉,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조형적으로 완벽한 불상을 만들었다.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인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도 고려된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이 복원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발견됐다고 선전한 점, 과거 유물에 대해 찬탄하면서도 조선의 현실이 '쇠락한 문명'이라 강조되었던 점 등을 들어 석굴암이 일제에 의해 변모된 조선 근대의 표상, 제국주의의 성공적 지배의 상징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런 결로 현상을 해결해 주었던 것은 석굴암 밑을 흐르는 냇물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석굴암의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콘크리트를 완전히 없애고 냇물이 흐르던 처음 그대로 놔두는 것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한 프랑스 뼈를 삐냐 국가 박사 이종호의 글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태녕 박사는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 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의 보수 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석굴암은 샘물이 용출하며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김을 막았는데, 근현대에 구조를 바꾸었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다. 이 샘은 10초에 1리터 정도 물이 솟아 나와 일 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 년 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려보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일제가 석굴암을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는 밀폐 구조로 복원한 뒤 박정희 시기에 재복원했을 때도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바깥의 공기가 들어오면서 내부의 표면온도도 함께 높아지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장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 물이 흐르는 습한 땅 위에 시설물을 세운 사례로 원성왕릉도 있으며, 여기서도 바닥의 습기에서 관을 보호하기 위해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거나 물을 흘려보내는 인공수로 장치를 만들어놨다. 그만 아니라 감은사는 아예 법당 밑에 바닷물이 드나들도록 지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신라인들은 습한 땅에 뭔가를 만들 때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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