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학 - 석굴암3
1). 석굴암3
본존불은 이상적 사실주의에 바탕으로 한 육감적인 관능성을 보여준다. 쇄골 표현이나 허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일직선이라거나. 불상의 표정은 자비롭다기보다는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처럼 왕을 연상케 하듯 무뚝뚝하고 근엄할 뿐만 아니라 덩치가 크고 남성적인 느낌이 철철 흐른다. 그 이유는 위에 서술한 전제 왕권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왕즉불 사상에 따라서 실제 경덕왕의 얼굴이 본존불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실제 비율보다는 관람자의 시선을 감안해 원근법을 활용했다. 본존불은 실제 인간의 신체 비례와 달리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고, 뒤쪽 지붕에 조각된 광배(후광)도 실제로는 약간 타원형이다. 간다라 불상이나 당시 그리스 석상에 비해 투박하지만 매우 힘든 화강암을 이 정도로 조각한 게 용하다. 석굴암의 주인공은 본존불이라 본존불에만 집중하기 쉽지만 둘러싸고 있는 십대제자를 비롯한 여러 부조도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조각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보통 석조 조각은 비교적 무른 대리석을 이용하지만, 석굴암은 암석 중에서 특히 단단한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으므로, 조각 난이도로서는 단언 최상위라 할 수 있다. 십대제자는 본존불 옆과 뒤에 있는데 출가한 순서대로, 본존불 오른쪽에 앞부터 1~5대 제자가 서고 왼쪽 앞부터 6~10대 제자가 배치돼 있다. 각자의 특성이 반영돼 있는데, 1대 제자 지혜 제일 사리불은 석가모니보다 나이가 많았던 만큼 어깨가 굽고 야윈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9대 제자 라훌라는 석가모니의 친아들인 만큼 나머지 9명 제자의 부조는 전부 본존불을 바로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모습인데 라훌라만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구도로 조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석굴암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본존불 맞은편 좌우에는 보현보살, 제석천, 문수보살, 범천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의 범천, 제석천 부조는 한국 불교 미술사에서 가장 빠른 시대로 의미가 크다. 마지막으로 관람자와 가장 가까운 부분인 전실에는 불교의 호법신 팔부신중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다만 왼쪽 맨 앞의 아수라, 왼쪽 3번째 건달바 등 일부 외에는 누가 어떤 팔부신중인지 비정이 정확하진 않은 상태다. 이 팔부신중은 뒤에 서 있는 다른 석굴암 조각보다 솜씨가 조금 떨어지기 때문에 경덕왕 시대에 김대성이 만든 게 아니라 후대에 추가로 조각해 넣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석불사 밑의 샘물도 주목할 만한데, 물이 건물의 하단부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물보라를 일으켜 석불사가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더욱이 햇빛이 비치는 날에는 물보라에 빛이 산란하여 무지개까지 만들어져 더욱 신비로웠다고. 석굴암 불상과 관련된 학술적 논쟁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성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에는 불국사가 751년에 중건되어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불국사의 창건 연대를 기록했을 뿐 석굴암을 언제 만들었는지는 적지 않았다. 심지어 불국사도 751년에 창건을 시작하여 김대성이 774년에 사망하고 나라에서 이어 완공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774년 이후 완공을 의미하지 774년에 완공이 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거기에 불국사 석탑에서 발견된 석탑 중수기 일명 묵서지편이 판독되었는데 여기에는 불국사의 창건 시작 연대를 742년으로 기록했다. 석굴암을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드느라 내부 조각상들의 양식이 서로 달라졌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본존불을 1 양식, 그 주변을 둘러싼 10 대제 자상을 2 양식, 사천왕이나 인왕상, 팔부중상을 3 양식으로 명명해 보자. 1 양식과 3 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 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이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을 취했는데,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은 오랫동안 석굴암 본존불상을 석가여래라고 판단했지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 김대성 관련 설화 또한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김대성 설화에선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생의 부모가 극락왕생하길 바랐다면 아미타불을 조성함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 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다.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에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고 주장함은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 대제 자상 때문이다. 10대 제자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므로 석가 불상에만 함께 배치한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아미타불 상 주변에 배치한다면 굉장히 이상하다. 또한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는 십일면관음의 부조가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 석굴암 유네스코 등재. 유네스코는 전 세계의 교육, 과학, 문화 보급과 교류를 위해 설립된 유엔의 전문 기구다. 유네스코가 하는 일 중 대외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세계유산 지정이다. 세계유산은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 이 둘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 복합유산으로 구분된다. 2021년 7월 기준으로 167개국 1,121건의 세계유산이 등재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연합국 교육부 장관들이 영국 런던에 모여 교육 재건과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를 창설하기로 했으며, 2차 대전의 종전 후인 1945년 11월 16일 영국 런던에 모인 37개국 대표가 을 채택하여 유네스코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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