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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세종대왕

by go1700 202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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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세종대왕


1). 세종대왕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농사직설)을 펴내었지만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이 한글로 발전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써 널리 쓰이고 있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육등법과 연분구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세종대왕의 정책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사대 정책을 취하였으며 매년 조공하고 조공품보다 후한 물품들을 받았으나, 공녀 등의 인적자원과 광물의 조공은 국가 재정의 큰 부담이 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명나라에 처녀와 금은을 조공하였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태종대에는 진헌 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세종 시대의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공녀는 74명으로 태종 때의 40명보다 증가하였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청하여 조공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명나라로 차출되는 공녀들은 이송 전 입궁하여 왕비의 위로를 받았으며, 남겨진 가족은 후하게 대접받았다. 태종 · 세종대에 조선인 공녀 중 일부는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황제의 사망 후 순장되었다. 세종은 이복동생인 함양군과 인순 부윤 원 민생 등을 명에 보내어 작고 척박한 땅에서 금은이 나지 않음을 이유로 금은 조공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430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3. 훈민정음 

 

훈민정음을 만드는 정책을 추진할 때 세종은 되도록 비공개로 추진하거나 최소한의 인원으로 극비리에 추진함으로써 반대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훈민정음 창제엔 백성을 교화하거나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 세종은 백성들이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하며, 우리 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28개의 글자를 창제하였다. 글자의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으며 자음은 오행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다.

 

4. 세종의 말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하였다.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육식을 즐겼기 때문에 젊은 시절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으나 노년에는 질병을 앓아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이유로 1948년 그려진 국가표준 영정이나 이당 김은호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세종이 사냥 외에 별다른 움직임이 적었기 때문에 종기와 소갈증, 품질과 성병의 일종인 임질 등을 앓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시각 장애를 앓아 괴로워하는 기록이 있다.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세종은 당뇨병을 치료하기 위해 식이요법으로 흰 수탉(백 웅계)을 자주 먹었다. 이는 어의 처방에 따른 것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훗날 세조 6년 1460년에 전순희가 편찬한 당대 최고의 식이요법에서 당뇨병 치료법으로 소개되어 있다. 치세 말년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하여 제대로 집무할 수 없게 되자 세자 향이 대리청정하였다.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고 불교 사원을 방문하여 불교의 힘을 빌렸다. 1446년 소헌왕후가 죽은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하였다. 1450년 2월 4일, 병세가 악화하여 영응대군의 집으로 이어 하였고 2월 17일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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