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학 - 병자호란
1). 병자호란
1636년 12월 28일부터 1637년 2월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나라의 성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나 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서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 교체 시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만의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컸다.
2). 병자호란 배경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명나라의 북동 지역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여진족은 명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아이신 교로 누르하치가 숙긴, 말갈, 여진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명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고 몰락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3).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국력의 상실, 이괄의 난으로 인한 군사력의 감소, 오합지졸의 군사, 수성 위주의 방어전술, 최고 지휘관의 무능, 강화도 도하 실패 등의 원인이 있다. 청나라는 산성과 거점 지역을 무시한 빠른 진군으로 강화도를 함락하였다. 결국 조선은 남한산성 내부에 비축된 식량의 부족, 청에 의한 강화도 함락, 구원군의 지속적인 패배로 인한 사기 저하로 항복하게 되었다.
4). 병자호란의 영향
명나라로 조공을 하던 조선이 반대로 오랑캐에게 조공하게 되는 사실이 조선 왕과 명나라를 떠받들던 식자층은 큰 충격을 받아 이후 불발론이 대두하였으며, 청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운동이 일어났다. 한 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5). 병자호란 이후 국제 정세의 변화
명나라는 국운의 쇠퇴하였고, 가장 강력한 제후국을 잃음으로써 사실상 청나라와의 경쟁력이 상실되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치러갈 때 후방 위협요인을 사전 제거함으로써 명나라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였다. 조선은 국운이 쇠퇴하였고, 청나라의 제후국이 됨으로써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고 조선 말기의 암흑기를 야기하였다.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의 경쟁 세력인 명나라의 멸망과 조선의 쇠퇴로 반사이익을 보며 국력을 향상하였다.
6). 병자호란의 결과
전쟁이 끝나자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의 실함이 인조의 남한산성 출석을 재촉게 하였으니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유수 겸 주사 대장으로 해상의 방어를 맡았던 장신은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왕명에 의해 자살하도록 했다. 검찰사로서 강화 수비의 부책임자였던 이민구는 영변에 위리안치되었다. 충청 수사 강진한은 사력을 다해 바다를 지켰으나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과 천 두나라는 종법은 관계로 굳어져 가면서 처의 위협이 거세지고 조선의 복종이 강요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종속시키기 위한 화의 교섭을 통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 조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군신 관계가 재확인되었다. 청나라는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점을 기념하기 위한 비의 건립을 조선에 강요하여 불가피하게 응하였다. 인조가 남한 출석에 앞서 합의한 강화 조약의 기본 원칙에는 연호 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명나라의 수정이라는 연호를 버리고 청의 성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는 약속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개월 동안 제대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으며 청은 청나라의 연호만을 쓸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인조는 결국 청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공사 문헌에 청나라 연호인 성덕을 사용할 것을 내외에 명하였다. 청에 대한 배척 의식이 고조되어 가는 과정에서 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 왔다. 그것은 청 태종이 명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파병 반대 여론이 강했으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군이 대명 전에서 싸움을 기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청나라는 조선군의 주장을 교체시킬 것과 포수 오백명을 증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통제사 유정 익을 유림의 후임으로 삼아 포수 오백명을 이끌고 금주로 향하도록 하였다. 전후에 처리해야 될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납치된 수만인의 속환 문제였다. 특히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비싼 것은 1,500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하여 속환 사녀의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1645년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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