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학 - 정조대왕
1). 정조대왕
조선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11세 때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으며, 할아버지인 영조가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께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천 명당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 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소론이 생부 장조(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특히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 박해) 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론 내 소수파였던 북학파 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으로, 사후 시호는 문 성무 열성인 장 효 대왕이며 존호는 장위,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 경청 명도 흥덕 현모 문 성무 열성인 장효선 황제이다.
2). 정조의 출생
정조는 1752년 10월 28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 전에서 태어났다. 형인 이소 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이 되었다. 이소 세자의 장례를 치른 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755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 발부 수지부모 불감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김종수를 세자의 교리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 4월 14일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15세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그의 일 처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책하였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짐짓 떠보기도 하여 세자는 홍역을 앓는 와중에도 돗자리를 깔고 사죄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태어난 해인 1752년 영조는 병중에도 사도세자가 올리는 탕약을 받지 않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불화로 심리적인 위기를 겪었다. 장인이었던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사도세자는 노론이었던 홍봉한 가문을 처족으로 맞이하였지만 대리청정하면서 소론에 우호적이었고, 노론과는 충돌을 거듭하여 영조와 불화를 자초하였다. 또한 관해서, 서연 불참, 기녀들과 풍류를 즐기는 등 문제 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영조 스스로가 경종 시절 노론의 힘을 업고 왕세제가 되어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책 역시 노론의 입장을 두둔할 수밖에 없었다. 1762년 윤오월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뒤에 죽었다. 윤오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무경선 전관 이석 문이 어린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치고 궐내로 들어왔다. 어린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강제로 끌려 나갔고, 유숙, 권 정치 등이 세자 구명을 상소했으나 거절당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6일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죽음이 병 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고, 영조는 금 등 고사를 언급하며 더 이상 이 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기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4). 정조의 정책
정조는 탕평책을 계속하여 이어갔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 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탕평책은 원론적으로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실재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이었다. 영조는 스스로를 군주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로 자처하였고 집권 후기 정조 역시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 천 명월 주인옹이라 칭하였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룐 탕평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중론 탕평을 실행하였다. 정조는 명절과 의리를 앞세운 중론 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 등에서 준론파를 새롭게 영입하고 기존의 외척과 노론 벽파를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영조나 정조가 내세운 명리와는 달리 현실의 영조 시대에는 각색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된 형국이 되었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벽파와 시파로 구분되게 되었다. 또한, 사상의 측면에서도 정조의 준론탕평은 이미 시대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의뢰론을 온존시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 운영을 하여 세력 간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으나, 기존 정치 세력의 참여 기반은 좁아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포섭하지도 못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운영은 결코 새로운 정치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점차 보수화되었다. 결국 관료, 산림, 외척 등이 정치적 논리 없이 서울과 왕실을 중심으로 가문을 팽창시키는 데 몰두하였다. 그 결과 정조 사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5). 정조의 말기
1800년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등으로 번졌고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기 위해 시작하여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하였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이실 수의 지휘 아래의 내의 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 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 훈방을 받기로 하였고, 연 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하여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은 정조는 음력 6월 28일 유시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어 하였는데, 본래 능은 건릉으로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융릉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1821년에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영돈령부사 박수종은 현재의 건릉 자리가 흉지이므로 능을 천장하여 합장해야 한다고 순조에게 건의했고, 건릉은 현재의 자리로 천장 되어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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