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학 - 미국과 소련의 중국지원
1). 미국과 소련의 중국지원
중국 국민당은 이 법을 통하여 필요한 군수물자를 살 수 있는 화폐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의회는 피트먼 법을 통과시켜 중화민국의 은을 미국의 금과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난징 대학살 이후 1940년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반도를 침략하고 나치 독일-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자, 미국 의회에서 대일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곤경에 빠진 일본 제국은 제재를 가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중화민국을 묶어 이른바 'ABCD 포위망'이라고 칭하며 일종의 배후처럼 선전하였고, 이들 국가에 대해 맞선다는 구실을 내세워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소련의 지원. 일본군이 화북 지방을 침략하자, 중화민국 정부와 소련 정부는 협상을 진행하여 8월 21일 난징에서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상에서 소련은 200대가 넘는 항공기와 화포, T-26 전차 등 군사 물자들을 중화민국에 원조하기로 하였다. 이어 소련은 1억 달러의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고, 소련에서 훈련된 의용 파일럿들도 극비리에 중일전쟁 전선에 투입되었다. 소련의 이러한 비밀 원조를 '제트 작전'이라고 한다. 1937년 7월 7일, 루저우 다리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근대화된 산업력에 바탕을 둔 잘 훈련된 30만 명 이상의 정규군과 일본군 장교에 의해 지휘가 이루어지는 만주국 출신 만주인 및 내몽골인 부대 최소 15만 명, 그리고 약 200만 명에 가까운 예비군과 당시 세계 3위의 강력한 해군력과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 국민당은 수적으로는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있었으나, 현대식 무기로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부대는 약 30만 명인 장제스의 직속부대뿐이었다. 나머지는 지방 군벌들 세력이 주축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변변한 장비조차 갖추지도 못하였다. 해군 역시 일본군의 총배수량이 100만톤에 달하지만 60,000톤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60,000톤 역시 대부분이 구식함정이나 소규모 구축함, 어뢰정이었고 그나마 신식 함정도 1932년 일본 조선소에서 건조한 2,500톤급 경순양함인 하와 이 임 하를 본떠 자국에서 건조한 핑하기 등 수 척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해군이 수십 대를 가지고 있던 잠수함과 항공모함 또한 없었다. 그나마 전쟁 직전 해군 참모총장 천샤오콴의 요청으로 독일에서 잠수함 수 대를 주문했으나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대중 무기 금수조치를 내려 인도받지 못하였다. 공군의 질은 그나마 일본군과 비등해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 항공기 수 대를 격추하는 등 선전했으나 역시 파일럿들의 훈련이 일본군에 비해 심하게 떨어져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했다. 7월 28일 중국 29군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했고, 7월 30일에는 베이징, 톈진을 점령했다. 중화민국 정부군은 화북지역에 '장제스 라인'이라고 불리던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제1 방어선은 바오딩-친 현, 제2 방어선은 안양 현-지남을 따라 구축되었다. 이 지역엔 수많은 토치카와 방어진지가 세워졌다. 장제스는 8월 7일 국방 회의에서 전면 항전을 결의시켰고, 12일에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8월 9일, 일본군 장교와 병사가 중국군 관할 하의 상하이 훙커우 공항에 난입하다가 사살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상하이에서도 양국 간의 긴장이 격화되고, 결국 8월 13일 상하이의 조계지를 경비하던 일본군 해군 특별육전 대가 상하이의 중국 관할구역을 선제공격하고 이어 23일에는 2개 사단이 상륙하는 등 하중에서도 전투가 시작된다. 일본군은 양면에서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을 협격했고 결국 11월 12일 타이위안은 일본군한테 함락된다. 한 후 쥐는 이후 산둥성 방어전에서도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비행기로 혼자 작전 도주해 결국 1938년 1월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총살된다. 옌시산은 그의 잔존군대와 산시성 남부의 린펀으로 후퇴했고, 이곳은 산지인 만큼 일본군은 쉽게 추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8년 3월 일본군은 결국 이곳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옌시산은 장제스 몰래 일본군 지휘관과 싸우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이후 산시성 남부 산악지대의 산을 중심으로 양군 간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오히려 옌안에서부터 확장하기 위해 시작한 중국 공산당이 옌시산의 영지를 잠식하자 산시군-팔로군 간의 전투가 더욱 많이 벌어졌다. 이와 동시에 9월부터는 일본군이 화북 지방에서 남진을 개시하기 위해 시작한다. 일본군의 화북 지역 공격은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산시성 지역에서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9월에 린뱌오가 이끄는 팔로군 115사단과 허풍이 지휘하는 120사단이 평형 관에서 일본군을 매복 공격해 2개 중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동시에 국민당군 역시 평형과 방어진지를 차리고 일본군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평형관 전투는 팔로군이 대 일본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고, 중국공산당은 이 승리를 크게 선전했다. 9월 22일 공산당이 '정성 단결 일치 항적 선언'을 발표하고 그다음 날인 23일 장제스가 이 선언을 받아들이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완성되었다. 10월에는 신 커 우전에서 웨이리황의 지휘 아래 중앙군과 산서 군이 일본군 제5사단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일본군의 선발대로 출격한 12여단은 싱커 우전의 중국군 포위망에 걸려 수천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화북에서 치러진 초기의 전투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이때 팔로군도 유격부대로 나서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비행장을 파괴함으로써 국궁 양군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화북 지역 점령은 지지부진해졌고, 진격은 1개월 정도 지연됐다.하지만 장제스가 산시성을 공격하는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해 증원을 저지하라고 명령한 산둥성장 한 후 쥐는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작전 도주했고, 이에 일본군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10월 말 중국군 측면의 냥쯔관을 2개 사단으로 공격해 장악한다. 이때까지 신 커 우전을 잘 방어하고 있던 중국군은 측면을 위협받게 되었고, 결국 11월 초 옌시산은 신 커 우전을 포기하고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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