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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만주사변

by go1700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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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만주사변

 

1). 만주사변

 

오랜 기간 동안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무려 9,600km라는 장정 끝에 1935년 10월에 섬 서서 옌안에 다다랐을 때, 살아남은 공산군은 약 2만 명뿐이었다. 만주의 근거지를 잃은 동북 군의 실력자 장쉐량은 1936년 1월 말 자신이 경영하는 동북대학생들이 시안에 찾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은 뒤로 항일여론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북 군 안에서도 '반공보다는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1936년 11월 관동군이 내몽골을 독립시키기 위한 공작의 하나로 수원 사건으로 알려진 몽골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장쉐량은 수원성을 지키던 중국군을 돕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장제스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이를 불허하고 오히려 '공산군 토벌'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섬 서서 북부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에 나설 준비가 된 뒤 12월 4일 시안에 도착했다. 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동북 군의 장쉐량과 서북 군의 양호성에게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따르든가 아니면 동북 군과 서북 군을 각각 푸젠성과 안후이성으로 이동시키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했다. 장쉐량과 양호성으로서는 '일치 항일' 여론이 동북 군과 서북 군 전체에 확산한 상황에서 공산당 토벌 명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뒤의 선택 역시 자신들이 거세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은 일종의 쿠데타인 병 간을 결의하고 제6차 공산군 소탕전 명령이 발동된 12월 12일 새벽에 장쉐량이 장제스를 그의 숙소인 '화칭츠'에서 체포, 감금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2월 13일 장쉐량은 '모든 내전 정지', '민중 애국 운동 개방', '쑨원의 유족 준수', '구국회의 소집' 등 8가지 요구사항을 전국에 통전했다. 이와 동시에 장쉐량은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있는 보안으로 비행기를 보내 공산당 측 대표를 초청했다. 중국에 대한 일본 제국의 21개 조 요구안에 대해 중국은 그 조약의 폐기 또는 무효를 주장하고,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의 후원을 받았던 봉 천파 친일 군벌 장쭤린이 1928년 일본군에 의해 열차 안에서 폭사 당한 후, 아들 장쉐량은 반일 운동 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장쉐량은 국민당의 장제스와 손을 잡았는데, 당시 일본 제국은 대륙에서 완전한 식민지를 얻는 한편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근거지로 삼기 위해 만주 지배를 획책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봉천교와 유 조구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해 놓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동'이라 몰아붙여 이를 구실삼아 만주를 침략한다. 그다음 날 일본군은 펑톈, 장천, 잉커우를 점령한 데 이어 21일에는 지린지까지 진격했다. 이때 일본군의 병력은 14,0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도 압록강을 넘어 북진했다. 한편, 이 무렵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는 제3차 공산군 토벌 작전에 나선 상태여서 군대를 북상시킬 수 없었으므로 일본과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신병 치료를 하고 있던 장쉐량은 장제스의 밀렵에 따라 전보로 전군에 무저항 철수를 명령했다. 일본군은 1932년 2월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했다. 일본의 만주 침략에 중국은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부저항' 정책을 택하면서 외교적인 수단으로 만주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장제스는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재해 주기를 희망하여 만주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9월 30일 터키에서 철수한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일본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듬해,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수반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만주는 일본 제국의 자원 공급지이자 경제시장, 군사 기지 역할 등을 하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만주를 발판으로 적극적으로 중국을 넘보기 위해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1933년 5월 25일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 제국에 정전을 요청했고, 5월 31일 톈진의 외항인 탐구에서 중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정전협정에는 일본군이 만주국 안으로 철수하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둔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이는 곧 만주국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난징 국민정부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광대한 만주 땅의 구석구석에까지 일본의 지배력이 미칠 수는 없었으므로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항일 무장 활동이 계속됐다. 1924년, 군벌과 열강 세력들을 몰아내자는 목표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1차 국공합작을 함으로써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7년 4월부터 국민당 장제스가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국공합작이 깨지고 국민당은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전을 펼쳤다. 1931년 난항 지역에 중국 공산당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공산당의 세력이 넓혀지는 것을 우려한 국민당은 무려 5번이나 공산당 지구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펴나갔다. 제1회 토벌은 1930년, 2회와 3회는 1931년, 4회는 1932년 6월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1933년 10월에 100여만 명의 국민당 군대가 제5회 토벌을 시작했다. '공산당 토벌'을 4차례 실패를 겪은 장제스는 '군사 3할, 정치 7할'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농민을 호운으로부터 떼어놓으면서 철저한 경제적 봉쇄 작전을 폈고, 수천 개의 토치카를 만들어 공산당의 근거지인 난항을 압박했다. 이에 맞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법학적성시험 로프의 지도 아래 정규군에 의한 정면 대결 전술을 택했으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호운의 거점은 차례로 격파됐고, 1934년 3월 중국 공산당의 영역인 광장이 함락되었다. 광장이 함락됨으로써 공산당 세력은 거의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강서 소비에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북상 항일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34년 10월에 호운의 주력인 제1방면군이 이른바 '대장정'에 나서면서 강서 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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