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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시안사건 루거우차오 사건

by go1700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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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시안사건 루거우차오 사건

 

1). 시안사건

 

상하이의 애국 영수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면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 공산당 토벌 정책을 정지하고 호운과 연합해 항일한다. 각 당, 각파, 각계, 각 군을 망라하는 구국 회의를 소집해 항일 구국의 방침을 결정한다. 중국의 항일에 동정하는 국가와 동맹관계를 수립한다. 섬서성에 들어와 있는 중앙군 부대를 동관에서 철퇴시키는 명령 등 서북의 군정은 장쉐량과 향후 청에 맡긴다. 이 협정은 장제스의 체면을 위해 공식 서명도 공개도 하지 않은 이른바 '인격 담보'의 약속이었다.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되어 시안을 떠나면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언명했다. 장쉐량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겠다면서 장제스와 동행했다. 시안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은 항일전선의 기반이 되었다. 1937년 2월 시안에서 첫 국궁 회담이 열렸다. 국 공회 담은 9월까지 장소를 바꿔가며 다섯 차례에 걸쳐 계속됐다. 중국 국민당은 군의 통일, 정권의 통일, 적화선전의 정지, 계급투쟁의 중지를 요구했다.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의 여론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나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감금한 사건이었으므로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소련 신문들조차 이에 대해 "친일 분자의 음모"이며 "반일 세력의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일본 측 신문은 "장쉐량의 독립 정부와 소련이 협정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제국은 장제스가 제거되면 난징 정부를 친일파가 장악할 수 있게 하려고 획책했다. 난징 국민정부에서는 장제스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하고서라도 장쉐량 세력을 토벌해야 한다는 견해와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바라는 견해가 대립했다. 중국공산당도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으며, 당내에서는 공개재판을 거쳐 장제스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나왔다. 시안에서 장쉐량에게 체포되어 감금된 장제스는 병간을 수용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12월 16일 난징 국민정부의 실권자 가운데 한명인 허일 친이 토벌군 총사령으로 임명되고 '토벌량'이 내려짐으로써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마저 커졌다. 국민당군은 장쉐량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섬 서서 동쪽의 동관으로 진입하고 시안 근교를 폭격했다. 한편, 장쉐량의 동북 군 소속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장제스를 처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태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장제스는 석방돼야 하고, 중앙정부의 지도 아래 대일항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대다수 중국인은 시안사건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면 일본의 침략에 유리한 정세가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고, 장제스만이 전국의 무력을 통솔할 수 있으니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2월 18일 중국공산당은 난징 정부의 실권이 허잉친에게 넘어간 것을 고려해 평화적인 문제해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저우언라이, 예젠잉, 친방셴 등 3명이 시안으로 갔다. 이로써 장쉐량, 향후 청, 중국공산당 대표와 국민정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장쉐량, 향후 청에 대해서는 장제스가 정식 교섭 상대가 될 수 없는 자기 부하로밖에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교섭은 실질적으로는 중국 공산당과 난징 국민정부 사이의 직접 교섭이었다. 협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개조해 친일파를 구축하고 항일분자를 영입한다. 

 

2). 루거우차오 사건

 

전투는 처음에 제한된 국지전에 불과했고 서둘러 제안된 교섭으로 양측은 7월 11일 협정을 맺고 이 사건을 덮어두기로 결정하여 사태를 되돌려놨지만, 전쟁 발발의 구실을 찾던 일본군 상부는 이 사건을 전쟁의 명분 구실로 잡았다. 7월 11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일본 본토에서 3개 사단, 만주에서 2개 여단, 조선에서 1개 사단을 각각 화북 지역에 보내 그 지역의 병력을 증강하기로 결정했고, 일본은 중국 본토 침략계획을 세우기 위해 시작했다. 이에 장제스도 하중, 화남의 병력을 정저우에 집합시키고 바오딩으로 30개 사단과 쑨롄중의 2 집단군, 류치의 7집 단군을 북상시키는 등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에 일본 참모본부는 육군사에 스기야마 아주머니의 강력한 주장으로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낸다.'는 전략 아래 7월 28일 화북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제2차 국공 합작.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날 무렵, 7월 8일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 자위전쟁에 나서자고 주장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당시 야산에서 국방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는 중국공산당 대표로 저우언라이도 참석했다. 이어 7월 17일 장제스는 "만일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갈림길에 이르렀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만 있을 뿐이며 항전이 있을 뿐이다."라는 내용의 이른바 '여신담화'를 발표했다. 7월 28일 중일 간의 전면전이 발발함에 따라 공산당은 국민당 휘하의 변구로 격하되고 1937년 8월 7일 장제스는 국방 회의에서 전면 항전을 결의한다. 8월 12일에는 장제스가 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중일전쟁의 사태가 급박해지자, 장제스는 호운의 병력 규모를 3개 사단 45,000명으로 하고 지휘체계와 관련해 정부가 각 사단에 연락 참모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호운의 총지휘에는 주더, 부 총지휘에는 펑더화이를 임명한 독자적인 지휘부를 설치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어 8월 22일 공산당의 홍순이 국민 혁명군 제8로 군으로 개칭, 국민당 휘하 군대로 합류하였다. 그러나, 제2차 국공 합작 중에도 양측의 갈등은 여전했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다투면서 개별적으로 항일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장제스의 정부군은 정면 전장에서 지구전 형식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였고, 공산군은 일본군 후방의 전장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진행했다. 1937년 7월 7일 야간 전투 훈련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의 머리 위로 10여 발의 총탄이 날아온 직후 일본군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병은 용변 중이어서 20분 후 대오에 복귀하였으나, 이 역시 일본군에 뒤늦게 알려졌다. 일본군 특무기관장 마쓰이는 곧장 중국의 최전선인 완핑현성으로 가 현장 왕릉 자이, 베이징 시장 장자 충 등과 교섭을 하기 시작했다. 교섭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전투가 벌어졌는데, 중국군 사상자가 일본군보다 수 배 더 많았다. 일본군은 "중국군 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중국군이 일본 병사를 납치해 갔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를 구실로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출동시켰다. 일본군은 7월 8일 아침부터 루거우차오를 수비하고 있던 중국 제29군을 공격하여 하루 만에 다리를 점령하였고, 중국군은 융딩강 우안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지시를 내린 자는 무타구치 렌야였다. 이 사건은 뒷날 일본군이 조작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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