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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백제 신라 가야 탐라

by go1700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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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백제 신라 가야 탐라

 

1). 백제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 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존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 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 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부여를 계승해 국호를 남부여라 하고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는 등 중흥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35]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신라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 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이사부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기벌포 등등에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3). 가야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보자 5~6세기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부족 국가의 연맹체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532년 수도인 금관가야 등이 신라에 정벌, 투항하였고, 결국 대가야가 562년 최종적으로 항복함으로써 가야는 멸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의 패망 원인으로는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 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4). 탐라

 

탐라는 때때로 탐 몰아 국, 설워라, 탈라, 담보라, 탐라로도 지칭되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섬나라"를 의미하며 동이전에서는 주량이라고 적고 있다. 알렉산더 보빈은 제주도의 옛 이름이 탐 무라 이며 일본어로 타니 무라 또는 타지 무라 이기에 15세기 이전에 한국어 사용자로 대체되기 전에 제주도에 일본어 사용자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한 전설에 따르면 탐라를 건국한 세 명의 신성한 시조인 양을나, 고을나, 부으려는 기원전 24세기에 땅의 세 개의 구멍에서 나왔다고 한다. 삼성혈로 알려진 이 구멍은 지금도 제주시에 보존되어 있다.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로부터 솟아 나왔다. 탐라는 제주도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백제와 통일신라 때까지는 국가적 지위에서 한반도의 나라들과 교류하였다. 고려 초에 독립적 지위를 상실하고 복속되었으나, 460여년에 걸친 성주시대 동안 제주 고씨가 성주로서 서 탐라를 다스리고 남평 문씨가 왕자로서 동 탐라를 다스리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다가, 1402년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맏이는 양을나, 그다음을 고을나, 셋째는 부을 나라고 했는데 세 사람은 수렵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어느 날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석함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 한 사람이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구독과 오곡의 종자가 있었다. 사자가 "우리는 일본의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세 왕녀를 낳고 말하기를 「서해의 중앙에 신자 세 사람이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구나」 하고는 저에게 분부하여 세 딸을 모시고 여기에 오도록 한 것입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한 후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세 여자를 나누어 아내로 삼고서, 샘이 닳고 땅이 비옥한 곳으로 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점치고는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라 하였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라 하였으며, 부어 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라 하였다. 처음으로 오곡을 파종하고 가축을 길러 나날이 부유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15대손에 형제 세 사람이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큰아들을 성주라 부르고, 둘째 아들을 왕자라 불렀으며, 막내아들을 도내라 불렀다. 읍소는 탐라라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왔을 때 처음 탐지에 정박하였기 때문이다. 각기 보개와 의대를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자손이 번성하면서 고씨가 성주가 되고, 양 씨가 왕자가 되며, 부 씨가 도산되었다. 후에 양을 양으로 고쳤다. 설화에 따르면 양을나가 제주도에 온 후, 반신화적인 상자가 섬 해안에 밀려왔다. 양을나는 상자를 뒤져 세 여인, 말, 소, 그리고 쌀, 곡식, 서곡, 보리, 대나무 등의 농경 종자를 발견했다. 이윽고 세 사람은 탐라국을 세웠다. 그는 제주 양 본관의 시조인 양당의 전설적인 조상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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