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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고려 조선

by go1700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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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고려 조선

 

1). 고려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새로이 등장한 권문세족은 불법 행위로 사회 모순을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원이 점차 쇠퇴할 즈음 즉위한 공민왕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 정치,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과 신진 사대부 계층의 성장 기반 마련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등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하였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고려 사회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왜구와 홍건적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의 이성계는 정도전을 위시한 신흥 사대부들과 결합하였고,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권문세족을 압박하는 개혁을 확대하여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고려는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다.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 멸망하기까지 475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이며, 우리나라가 코리아로 불린 것은 약 1000년 전인 이 고려 시대부터다. 고려를 드나들던 서역 상인들이 ‘고려’를 ‘코리아’라고 부르던 데서 한국의 영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만큼 고려는 국제화되고 개방적인 나라였다. 여성의 지위가 조선에 비해 훨씬 높았고, 문화적으로도 역동적인 다원사회였다. 고려는 개국 초, 각 지방호족에게 토성을 나누어 주어 자기 지역을 다스리는 본관지를 시행했고, 지방관을 파견한 주현을 통해 다른 속현을 다스리는 독특한 지방 지배체제를 갖췄다. 고려는 전기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양인을 늘렸고, 과거제를 도입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후기 권문세족의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새로운 세력에게 왕조를 내줬다. 대한민국의 한국사 학계에서는 이 고려 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 고려는 신라 말기 918년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건국하여, 송악을 개경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이후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 송정 책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자신들의 영향 아래 두고자 하였다. 거란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구이저우에서 거란군을 크게 섬멸하였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고려 사회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가 향상 되어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 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났으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는 일대의 제도 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강조의 정변, 서경 천도 운동,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무신정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와 함께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팔만대장경. 12세기 중반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위해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후로는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최 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전국 도처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다. 한편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로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려-몽골 전쟁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당시 집권자인 최 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결국 1270년 최 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의 항쟁은 모두 진압되었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이 부분의 본문은 무신정권, 원의 간섭기 및 권문세족입니다.

 

 
2). 조선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당성이 결여된 집권으로 쇠약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해 나가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육조직계제와 관제 개정 등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민으로 복귀시키는 등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 및 서얼들의 관직 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 이때 구성된 서얼 금고형과 적서 차별 제도는 성종 때 세부 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며 자손 금고형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되어 영조 때까지 서얼의 관직 임용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많은 서얼의 자유로운 활동의 제한 및 사회적 차별을 유발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유신을 자처하며 새 조정에 협력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중반 이후 서서히 고려 유신 세대는 사라졌고, 그 아들, 손자 세대는 새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전기·중기·후기로 나뉘기도 한다.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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