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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우산국 남북국 발해 후삼국

by go1700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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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우산국 남북국 발해 후삼국

 

1). 우산국

 

고구려와 왜의 교역 항로에서 요충지였던 우산국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정벌할 때, 무력에 의한 항복보다는 교묘한 계책을 써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나무 사자를 만들어 배에 나눠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모두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자 512년 6월에 항복해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이 시기는 신라가 북상하여 하슬라주를 설치하고 군주가 통치하는 시점으로, 이사부의 직함이 실직자 군주에서 하슬라주 군주로 바뀌고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하게 된다. 7세기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왜로 가는 해상 항로를 장악하여 승려의 통행만을 허락하였다. 우산국은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현재의 경상북도 울릉군인 울릉도와 부속 섬을 다스리던 나라다. 244년 왕기가 위 궁을 토벌하러 옥저 동해안에 도착했고 노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느냐 물으니 섬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나 여자만 있고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섬에서 쓰는 언어가 옥저와 다르다고 설명한다. 구전되어 오는 설화 속에 우산국의 마지막 왕인 우해왕과 왕비 풍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따라 백제, 고구려, 외국의 배가 자유롭게 신라 연안을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930년 우산국은 백길, 토우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을 원했고 태조는 두 명에게 관직을 내렸다. 1018년 고려는 우산국이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못하게 되자, 이원구를 보내 농기구를 보냈고 1019년 여진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했다. 1022년 우산국 백성 중 여진족에게 노략질당하여 망명 온 자들을 예주에게 거주하게 하고 호적에 편입되면서 멸망하였다.

 

2). 남북국

 

나당 전쟁의 마지막 해인 676년,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완전히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 난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 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로, 남북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통일신라라는 시각이 강했고, 이러한 관점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나,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를 필두로, 남인 실학파와 노론 북학파 계열 일부로부터 발해 역시 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이 시도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근대 이후 결실을 거두어 1980년대 이후 발해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9세기에 들어서 왕위 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고,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워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조정으로부터 자립하였다. 중하대 신라 시대에는 대동강 이남의 통일로 전쟁이 줄어들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불교문화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3). 발해

 

대조영은 이해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698년에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제2대 무왕은 연호를 인안으로 정하고,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북부여를 계승한 두막 누를 병합하고 흑수말갈을 압박하였다. 또한 무왕은 장문휴가 당의 등수를 공격하여 당에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제3대 문왕은 연호를 대응으로 하였다. 문왕은 영토 확장보다는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와 동부,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696년, 영주에서 거란족의 반란이 일어나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해졌다. 옛 고구려의 장수인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인 대조영은 이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한 후 영주에서 탈출하였다.  문왕은 발해의 수도를 중경 현덕부, 상경 용천부, 동경 용원부 순으로 옮기며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다. 그러나 신라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왕이 단명하다가, 제10대 선왕은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하여 발해 역사상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선왕대에 이르러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으며,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에게 선의 치세에 멸망하였다. 10세기에 들어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15대 220년간의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발해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문화와 당의 문화를 수용한 문화국가였다. 발해의 귀족이었던 열만 화는 발해의 유민들을 모아 압록강 부근에 정안국을 건국하였고, 2대 왕이었던 오현명은 거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986년 거란의 2차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4). 후삼국

 

후고구려는 국호가 태봉으로 변경되었고 태봉은 왕건에 의해 멸망하였다. 918년 왕건은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세웠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시대는 892년~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과 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 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신라 말기에 들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기에 이르렀고, 이 중 군인 세력인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고, 뒤이어 궁예도 901년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고구려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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