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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위만조선 원삼국 부여 고구려 옥저동예 삼한

by go1700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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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 - 위만조선 원삼국 부여 고구려 옥저동예 삼한

 

1). 위만조선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은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위만조선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개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예나 진국 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문제는 기원전 109년 섭섭한 보내 수거의 무역 독점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우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과 고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2). 원삼국

 

고조선 이후 세워진 부여는 철기를 바탕으로 한 연맹 왕국이었다.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증가한 생산력과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는 여러 소국이 건설되었다. 많은 소국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하였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동예, 옥저,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탐라, 우산국과 같은 연맹체 왕국들이 출현하였다. 이후 이러한 연맹 왕국에서 출발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주변의 왕국들을 병합하여 성장하게 된 삼국시대까지 여러 소국과 대국이 혼재하여 있던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 또는 열국 시대라고 한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예멘계의 부여족이 세웠던 부족 국가인 부여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동은 읍루,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 오한과 인접하였었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로 구분된다.

 

3). 부여

 

백제의 극성은 부여 씨가 되어서 2015년 기준 대한민국의 의령 여씨가 계승하였으며 충청남도 부여군의 명칭에도 영향을 주었다. 부여는 별도의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북부 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흘승골성에 도읍하였다는 건국 신화가 있고 동부여는 북부여와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세웠다고 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같은 제가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그 인구가 수천 호,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에는 부여의 영고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풍속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 특히 엄벌하였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538년 백제의 성왕은 부여를 계승하여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명맥을 이었다. 

4).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는 이후 주몽이라 불리는 군장을 중심으로 한 부여계 지배층이 이주해 와 고구려의 계루부를 형성하였고 기존의 토착 세력인 소노부를 대체하여 보구려 연맹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는 땅이 협소하고 산악지역이 많아 주변에 대한 전쟁을 자주 하였다. 주변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키며 확장하던 고구려는 부여를 흡수하여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5). 옥저 동예

 

동예는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부족사회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 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급락이 구분되어 각 급락을 함으로써 통치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라 불리는 소국이 있었다.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적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며, 예맥족의 부족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왕이 없고 각 지방의 맹주인 현 후가 군림하였다. 현 후 밑에 삼으로 하호를 지배하였다.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2만호에 이르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을 성립하지는 않았다. 이후 이웃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6). 삼한

 

기원전 3세기의 기록인 위서 동이전에는 삼한에 속한 나라들이 무려 70~80여 국에 이르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는 6~7백호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고 작은 소국들은 점차 연맹왕국을 이루어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되었다. 마한 : 삼한 중 가장 먼저 세력이 커진 것은 마한이었다. 기원전 8세기 이미 한반도 여러 곳에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는 지배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수많은 성읍 국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과 같은 수많은 고인돌을 남겼다. 한강 유역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맹 왕국이었던 마한 내의 목지국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을 지배하여 진국의 왕으로 불렸다. 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국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가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 기초를 다졌다.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이 경주평야의 6촌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한편 변한에서는 구야국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삼한의 생활: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였다. 농경과 철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별 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에 와 추수 감사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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