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학 - 중석기
1). 중석기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서 4천 년 전의 시기에 해당한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간석기를 비롯하여 빗살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한반도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 발견되며,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 문화라고도 한다. 간석기는 신석기 초기부터 쓰였으나 농기구나 무기에 간석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중기 이후이다. 특히 울산 남구 대곡리 반구대암각화는 신석기시대에 조성된 바위그림으로 선사인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의 중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하며, 학자에 따라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양양 오산리 유적, 홍천 하화계리 유적, 김해 패총 하층, 제주 빌레못 굴 등에서 발견된 유적들이 중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이들은 구석기인이 중석기시대까지 한반도에 정착한 유형 혹은 초기 신석기인의 유적으로 본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달리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쓰인 시대이다. 상고 시대는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국가성립까지를 가리키는 시대구분이다. 한국의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한다. 상고 시대의 중요한 사건은 국가의 형성이다. 그러나, 한국 사학회에서는 최초의 국가가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 대해서는 부족 집단에서 출발하여 국가를 이루었다는 부족 국가 설, 추장과 같은 지도자의 권력이 커지면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군장국가 설, 마을 단위로 모여 살던 사회가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는 성읍국가 설 등이 있다. 1940년대 이후 주장되어 온 부족 국가 설은 1960년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아 오늘날에는 학계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안된 군장국가 설과 성읍국가 설은 서로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고대사회 경제, 정치 관계에 대한 연구 성과를 근거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1990년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가 출판한 (한국사)에서는 성읍국가 설을 채택하고 있고, 서울대학교 출판부의 (한국사 특강)은 고조선의 출현을 군장국가 설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청동기는 기원전 약 2000~300년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국가가 이륙이 됨으로써 인구가 상승하고 약속이 필요해지자 법이 생겨난 것이다. 주철 기술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량을 많이 증가시켰다. 당시 주요 유물로는 철제 농기구, 철제 무기와 함께 막대 모양의 쇳덩이인 덩이쇠가 있는데 이 덩이쇠가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 계급이 철의 주조 능력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철기 문화는 무쇠와 강철이 거의 동시대에 발전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고조선 백두산은 한민족의 영산으로 자주 언급되며, 고조선의 건국과도 연관되어 설명된다.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요임금 즉위 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를 근거로 연도를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 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해당 기록은 단군 신화와 함께 서술된 것으로 그 정확성을 믿기는 힘들다. 한편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칭호로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단군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이나 재위 연도를 알 수는 없다.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근거로 단군의 이름과 재위 기간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으나, 환단고기는 많은 면에서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자료로 비판되고 있으며 역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와 위만조선 시기로 나뉜다. 근대 이전의 옛 역사서에는 기자조선이 등장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평가된다. 고조선이 중국 측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쓰인 제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공자는 동방예의지국인 구이로 망명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구이는 중국에서 고조선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이 요동이나 요소에 있는 평양인지 아니면 지금의 평양시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인 세형동검이 만주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문헌에 고조선이 연나라와 싸워 패했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전 3세기를 전후로 하여 남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후기인 위만조선 시대에 대한 기록에는 박사, 경, 대부, 상, 대신, 장군 등의 관직명이 남아있어 중앙정치조직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지방 세력은 독자적인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산 경계 경위 한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왕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2천호를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고조선은 노비와 귀족, 왕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고 팔조법과 같은 법률이 있었다.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의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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